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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3 대한민국 최악의 해양사고 와 언론 오버 사건 그날의 구조는 시민들이였다

by 둔자곰 2021.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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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0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인든 해산에서 탑승인원 362명을 태우고 가던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침몰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날 사건으로 70명만 구조 되고 사망한 사람은 무려  292명이 된다.

 

이야기는 그날의 생존자 중 우연히 탑승을 같이 한 세남자의 증언으로 시작이 된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근무하던 당시 최씨는 직장상가와 국장을 포함해 총 13명이

 낚시여행으로 서해 변산반도의 위도라는 작은 섬에서 가게 된다.

마침 10월은 위도에서도 낚시가 성수기 였던 때였다.

하지만 일요일이라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파도가 심상치 않았다.

 

노심초사 발이 묶인 이들에게 하루에 한번 뜬다는 110톤급 여객선이 다가오고 그들의 걱정은 말끔히 해소되었다.

풍랑주의보에도 끄떡 없을 것같은 대형여객선에 많은 사람들이 승선을 하게 되고 

기상 여건이 좋지 않았지만 여객선의 출항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출항을 하고 바다 한가운데서 푸드덕 소리를 내며 여갯선은 멈추더니 배는 급속도로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조사 당시 바다에 부유하던 어마와 나일론 로프등이 프로펠러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여객선이 침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날 침몰하는 여객선의 갑판 위에 난간에 메달린 남자와 

선실에 같힌 남자는 얼마지나 마주하게 되고 지금껏 보지 못한 참혹한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거대한 파도는 배를 뒤집기에 충분했고 탑승한 사람들은 바다에 내던지기 까지 했다 

한편 난간을 붙잡고 있던 최현철씨는 물에 떠있는 아이스박스를 보고 이것만이 살길이며 아이스박스를 붙잡고 물에 떠오른다, 

물위에 떠오는 최씨의 시야에서는 이미 서해휘리호가 사라진 뒤였다.

 

한편 선실안에 있더 경찰관 구성회씨는 배가 기우는 동안 문이 열지 않더란다.

가까스로 문을 여는 순간 물이 들어닥치고 그는 물쌀기에 따라 선실안으로 빨려들어간다 

 

그곳에은 수많은 사람들이 목만 내민체 생존을 이어가고 있었고 

수씨의 눈에는 선실 창문이 보여 주저없이 머리로 창문을 깨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깨져있던 창하나가 구사일생으로 구씨가 있던 곳에 물이 빠지면서 몸이 쭈욱 올라갔다고 한다.

 

10월의 차가운 날씨 속에 물위에 올라온 사람들은 저체온증으로 하나둘 바다 밑으로 떨어지고 

같은 시각 위도 앞바다에 있던 10톤의 낚시배 종국호는 배안에 낚시 손님이 있었지만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무전을 받고 

곧장 구조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종국호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안전한곳으로 내리게 하고 갈려면 가라고 하는 상황이였다

종국호의 이종훈 선장은 오히려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손이 필요하다고 설득하고 

승객과 함께 구조에 나선다

그러나 종국호는 서해훼리호 침몰 20분뒤에 도착을 했지만 바다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였다고 한다 

 

바다에 떠있는 몇몇사람들이 살려달라는 소리에 종국호의 사람들은 40명가량 물에서 끄집어낸다.

 

종국호의 배가 인원초과에 몰렸지만 구조작업은 계속 되었고 순간 뱃고동을 울리며 46척의 어선들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70명의 생존자를 구했지만 다음날 사고 직후 위도에서는 파도에 떠밀려 오는 시신들로 가득했다

 

당시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행양 참사였던 서해훼밀리호 사건 

그러나 그 뒤에 따라오는 최악의 보도 사건이 발생이 되는데

서해훼리호 선장과 승무원 7명이 사고 시점에 전원 탈출했다는 것이다.

이후 대한민국은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고 선장과 승무원을 찾기 위해 위도 원천 봉쇄를 하며 공개수사를 하기 에 이른다

이후 전국에서 쏟아지는 제보와 괴소문들

 

군산터미널에서 보았다거나 심지어 중국 밀항설까지,....

 

선장의 집에는 방송국 기자와 경찰들이 몰려와 진을 치고 자수를 종용하기도 하며 여론몰이로 선장의 가족들이 정신적 피해를 입게 되기 까지 한다.

그리고 얼마뒤 배안에서 추가로 발견된 것은 선장과 승무원들의 시신 

 

그들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다르게 끝까지 배를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서해훼밀리호 사건은 최악의 행양사건이였지만 최악의 오보사건으로 유가족들에게 큰 피해를 준 사건이였다.

 

그로부터 10년뒤 서해훼미리사건의 아픔을 방지하기 위한 매뉴얼을 만들었다면 세월호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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