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에 대한 논란은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요?
최근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쟁을 지켜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의 역사적 해석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실제 사건에서 출발한 극영화의 상상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관객의 몫이니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영화에 대한 비판이 출연 배우에게 향하기 시작했고, 그중에서도 주연 배우 유해진을 둘러싼 논란이 커졌습니다.
광고 제품에 대한 불매 움직임이 나타났고 결국 자택 앞에서 집회까지 열렸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영화에 대한 비판과 그 영화에서 한 인물을 연기한 배우에 대한 평가는 같은 것일까요?
이번 글에서는 《암살자(들)》 논란이 무엇인지부터 유해진이 그동안 어떤 영화를 통해 관객을 만나왔는지까지 한번 돌아보겠습니다.

암살자들 논란은 왜 시작됐을까?
《암살자(들)》은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입니다.
실제 역사적 사건과 기록에서 출발하지만 영화에는 가상의 인물과 상황도 등장합니다.
논란의 핵심은 사건의 배후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알려진 역사적 사실과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적 설정이 사용됐다는 점입니다.
이를 두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왔고, 반대쪽에서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극영화인 만큼 창작의 자유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섰습니다.
결국 논쟁은 영화계를 넘어 정치권까지 번졌습니다.
하지만 흥행에서는 조금 다른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논란 속에서도 《암살자(들)》은 개봉 11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영화를 둘러싼 비판과 실제 관객의 관심이 동시에 커지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진 삽입 ② 암살자들 공식 포스터]

그런데 왜 유해진에게까지 논란이 번졌을까?
문제는 영화에 대한 논쟁이 작품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출연 배우들의 SNS와 광고에도 항의성 댓글이 이어졌고 유해진이 광고 모델로 활동한 제품에 대해서는 불매를 주장하는 움직임도 나타났습니다.
결국 10월 4일에는 유해진의 자택 앞에서 영화 제작진과 배우들의 사과를 요구하는 집회까지 열렸습니다.
다음 날인 10월 5일 유해진의 소속사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허위사실 유포와 악의적인 인신공격, 모욕뿐 아니라 배우의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신변을 위협하는 행위를 엄중하게 보고 있으며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지점에서 이번 논란을 조금 나눠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암살자(들)》이라는 영화에 대한 비판과 배우 유해진 개인에 대한 공격은 같은 문제일까요?

유해진은 정치인이 아니라 배우다
유해진은 정치인이 아닙니다.
역사학자도 아니며 영화의 모든 설정을 결정하는 감독이나 작가도 아닙니다.
그의 직업은 배우입니다.
물론 배우 역시 자신이 출연할 작품을 선택합니다.
따라서 작품 선택에 대해 관객이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것까지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작품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배우가 광고하는 제품을 불매하고 개인의 생활 공간인 집 앞까지 찾아가는 것은 영화에 대한 평가와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유해진은 《암살자(들)》 한 편으로 갑자기 등장한 배우가 아닙니다.
그동안 수많은 작품을 통해 관객과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을 계기로 그의 지난 영화들을 다시 찾아봤습니다.
[

타짜 고광렬, 아직도 유해진 하면 떠오르는 캐릭터
유해진의 대표작을 이야기하면서 《타짜》를 빼놓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맡은 인물은 고광렬입니다.
주인공 고니의 곁을 지키면서 특유의 능청스러운 말투와 생활 연기로 영화에 웃음을 더했습니다.
유해진은 이런 역할에 특히 강했습니다.
일부러 웃기려고 하는 것 같지 않은데 웃기고, 웃기기만 하다가 어느 순간 진지한 얼굴을 보여줍니다.
주연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보고 나면 기억에 남는 배우였습니다.

럭키에서는 유해진이 영화의 중심이 됐다
《럭키》에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유해진이 영화의 중심에 섰습니다.
냉혹한 킬러가 사고로 기억을 잃으면서 자신을 무명배우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설정만 보면 과장된 코미디인데 유해진이 연기하면서 묘하게 현실적인 인물이 됐습니다.
《럭키》가 흥행하면서 유해진은 조연으로 강한 배우를 넘어 영화 한 편을 이끌 수 있는 주연 배우라는 것도 보여줬습니다.

공조에서는 가장 평범한 형사가 됐다
《공조》의 강진태도 빼놓기 어렵습니다.
북한 형사 림철령과 함께 움직이는 남한 형사지만 화려하거나 완벽한 인물은 아닙니다.
가족 걱정을 하고 겁도 먹고 실수도 합니다.
현빈이 강렬한 액션을 보여줬다면 유해진은 그 옆에서 영화가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현실적인 온도를 만들어줬습니다.
이런 평범한 사람을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능력은 이후 역사영화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유해진 영화를 따라가면 한국사가 보인다
유해진의 필모그래피를 다시 살펴보면서 재미있는 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한국의 역사적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상당히 많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를 다룬 《왕의 남자》와 《올빼미》가 있고 일제강점기로 가면 《말모이》와 《봉오동 전투》가 있습니다.
현대사로 넘어오면 《택시운전사》와 《1987》이 있습니다.
그리고 《암살자(들)》에서는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한 배우의 필모그래피인데 시대순으로 배열하면 한국사의 여러 장면이 이어집니다.
왕의 남자부터 올빼미까지, 조선시대에도 유해진이 있었다
《왕의 남자》에서 유해진은 광대 육갑을 연기했습니다.
이 작품은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시간이 흘러 《올빼미》에서는 인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단종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까지 이어졌습니다.
유해진은 사극에서도 왕이나 권력자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에 가까웠습니다.

말모이에서는 우리말을 지키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말모이》에서 유해진이 연기한 인물은 김판수입니다.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영웅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먹고살기 바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조선어학회 사람들을 만나면서 우리말을 지키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유해진이 잘하는 인물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영웅이었던 사람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되는 평범한 사람.
봉오동 전투에서는 독립군 황해철이 됐다
《봉오동 전투》에서는 같은 일제강점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여줬습니다.
유해진은 독립군 황해철을 연기했습니다.
《말모이》가 우리말을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면 《봉오동 전투》에서는 직접 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우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두 작품을 함께 놓고 보면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전혀 다른 유해진을 볼 수 있습니다.

택시운전사 황태술이 오래 기억에 남은 이유
《택시운전사》에서는 1980년 광주로 갑니다.
유해진이 연기한 인물은 광주의 택시기사 황태술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상당히 기억에 남는 인물이었습니다.
황태술 역시 처음부터 역사를 바꾸려고 거리로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시민입니다.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유해진이 역사영화에서 연기한 캐릭터들을 보면 이런 모습이 반복됩니다.
역사의 주인공으로 기록된 사람보다는 그 시대를 실제로 살아갔을 것 같은 사람들입니다.
1987 한병용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1987》에서는 교도관 한병용을 연기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시작해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시대를 그린 영화입니다.
한병용 역시 거대한 영웅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택시운전사》의 황태술과 《1987》의 한병용을 함께 놓고 보면 유해진이 한국 현대사를 다룬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조금 더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1974년 암살자들 박철구
《암살자(들)》에서 유해진은 다시 현대사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1974년입니다.
그가 연기한 박철구 역시 최고 권력자가 아니라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경찰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연결점이 생깁니다.
《택시운전사》에서는 시민이었고 《1987》에서는 교도관이었습니다.
《암살자(들)》에서는 경찰입니다.
직업은 달라도 모두 거대한 역사적 사건 한가운데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유해진이 이런 역할을 맡았을 때 관객이 쉽게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도 어쩌면 그의 연기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암살자들 논란과 유해진, 같은 문제로 봐야 할까?
결국 처음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암살자(들)》의 역사적 재구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비판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는 것도 관객의 자유입니다.
반대로 영화적 상상력의 영역이라고 보는 관객도 있을 겁니다.
그런 논쟁 자체는 영화가 공개되는 순간부터 피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비판과 배우 개인에 대한 공격은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해진은 정치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 편의 영화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배우도 아닙니다.
《타짜》의 고광렬로 웃음을 줬고 《럭키》에서는 혼자서 영화를 이끌었습니다.
《공조》에서는 친근한 형사가 됐고 《택시운전사》에서는 황태술이었습니다.
《1987》에서는 한병용이었고 《말모이》에서는 김판수였습니다.
《봉오동 전투》에서는 황해철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수많은 작품과 인물로 관객을 만나왔습니다.
한 편의 영화로 배우의 모든 시간을 판단할 수 있을까?
저도 모든 유해진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았던 작품도 있고 아쉬웠던 작품도 있습니다.
배우를 좋아한다고 그 배우가 출연한 모든 영화를 좋아할 필요도 없습니다.
반대로 영화 한 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배우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든 연기까지 부정해야 하는 것도 아닐 겁니다.
작품은 작품대로 평가하고 배우의 연기는 배우의 연기로 바라보면 됩니다.
이번 《암살자(들)》 논란 역시 역사적 사건을 영화가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겼습니다.
그 논쟁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비판이 배우가 살아가는 집 앞까지 향해야 하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유해진은 정치인이 아니라 배우입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그의 연기를 보면서 많이 웃었습니다.
때로는 울었고 그가 연기한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한국사의 한 장면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암살자(들)》 한 편만으로 배우 유해진의 모든 시간을 판단하기보다는 앞으로 또 어떤 인물로 돌아올지를 기다려보고 싶습니다.
영화 한 편에 대한 평가는 자유롭지만, 한 편의 영화가 한 배우의 모든 시간을 대신할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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